인적이 드물어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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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ans339 댓글0건 조회 7회 작성일 2025-11-0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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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물어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온통 담쟁이 넝쿨로 에워싸인 건물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김재규 폐가로 알려져 있다.#토지처음썼던집박경리 가옥 알림판은 전봇대에 작게 붙어있을 뿐이다..ㅠㅠ이곳은 종종 중고생들의 흉가 체험 놀이터처럼 쓰이는데 내가 갔던 날도 그 집 앞을 서성이던 한 고등학생이 집 입구가 어딘지 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있지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지난 토요일 <토지>를 함께 읽고 있는 팀과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을 찾았다가 해설사님으로부터 박경리 선생님이 원주로 내려오시기 전 서울 성북구 정릉에서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박경리 가옥 팻말 / 마을 입구다행인 것은 타운하우스가 조성되면 박경리 가옥 터에 문학관을 설립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알면 보인다.<불신시대>(1957),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5)등 시대의 상처와 개인의 고난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선생님은 정릉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작가로서 고독한 투쟁의 시기를 보냈다.#토지초고썼던곳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식당에 갈 때마다 담벼락에 희미하게 '토지'라는 글자와 박경리 선생님의 얼굴 벽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토지>를 읽지 않았었기 때문이다.서울시가 보전 의지를 밝혔지만 예산 및 매입 협의 문제로 직접 관리와 운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박경리 선생님의 숨결이 남아있는 이곳에 문학관이 세워질 날을 기대해본다~~또한1969년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980년 사위 김지하 시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딸을 돕기 위해 원주로 이주하기까지1~3부 중반까지 써내려간 의미 있는 장소다.박경리 가옥 이웃집 김재규 폐가. 정릉골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 첫집이다. 수십년 동안 비어있는 김재규 폐가는 박정희 군사 정권 시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들이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용도로 쓰인 곳이라고 한다. 5년 전 8월에 화재가 발생하였다.(이제 '토지'라는 글자도 지워져 잘 보이지 않는다..)#정릉골재개발사업경로당 안에는 할머님들과 할아버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2013년에 서울 속 미래유산에 포함되어 보전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근처까지 가는데도 별다른 안내판이나 현판 등 표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집을 지나칠 뻔했다.박경리 선생님은 1957~1980년까지 약 23년간 성북구(정릉)에서 거주하셨다.정확한 세부 내용을 알고 싶어서 성북구청 도시정비신속추진단 담당자에게 문의도 했다.박경리 선생은 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서 정릉 청수장 아래로 이사를 한 후현재는 개인 사유지로 남아있으며 작년까지 발도르프 학교를 운영했었는데 지금은 공실로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이곳은 도심에서 떨어진 외지고 조용한 동네로 한눈에 봐도 낙후된 곳임을 알 수 있다.1957년 남편 사망 후 생계를 위해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며 정릉으로 이사를 하셨다.서울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그때 보이는 것은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정릉 박경리 가옥 주소정릉골 마을은 현재 재개발정비 사업 중이다.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 작년까지 발도르프학교로 운영 중이었다가 지금은 공실이다. 지붕은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할머니 한 분이 나오자 박경리 가옥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미리 알아본 것처럼 지금 그 건물은 비어있다는 쓸쓸한 대답이 돌아왔다.원주에 있는 박경리 생가를 방문했을 때 해설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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